내가 한국 프로야구에서 제일 좋아하는 투수인, 半 한국인 용병, 다니엘 리오스 (35, 두산 베어스) 많은 사람들이 이오수라고 부르는 선수이다. 실력적으로나, 인격적으로나 정말 존경하지 않을 수 없는 선수. 얼마 전 부친상을 당해서 미국을 다녀오며 20여시간의 비행 후 돌아오자 마자 예정돼있던 선발등판 하고, 그 SK전에서 완봉, 8회 때는 3타자 연속 3구 삼진의 기록은 두고두고 회자될 우리 나라 야구의 후일담이 될 것이다. 이 페이스를 유지 한다면 용병 최초로 MVP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사실은 돼야 한다고 강하게 생각하는!) 싶은 그런 멋진 선수이다. |
리오스는 마운드 위에서 페이드 아웃되는 법이 없이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투수다.(사진 이휘영) |
당신은 한국프로야구에서 가장 성공한 외국인선수다.
고맙다. 열심히 운동을 한 결과다. 좋은 타자들이 많은 어려운 리그라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한국프로야구를 존경하는 마음도 잊지 않았기에 그런 칭찬을 듣는 것 같다.
지난해 34경기에 출전해 233이닝을 던졌다. 투구 수는 3,485개였다. 8개 구단 투수 가운데 가장 많이 공을 던졌다.
(직접 계산을 하며)이닝당 14.95개를 던진 셈인데 많이 던졌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게다가 선발로만 33경기에 출전하지 않았나. 물론 이보다 더 많이 던졌다면 문제가 생겼을 것이고 문제가 생겼다면 팀에 알렸을 것이다. 감독과 투수코치도 세심히 보살펴줬다.
그래도 무리가 있을 법하다.
(조용한 목소리로)나도 다른 투수들처럼 많이 던지면 팔이 아프다. 한계투구수를 넘어서면 자연스럽게 통증이 온다. 근육통에 시달린 적도 있다. 하지만 그건 투수라는 직업이 가져다주는 숙명적인 아픔일 뿐이다. 특히 난 선발투수이므로 다른 투수들보다 더 많이 공을 던져야 한다는 책임이 있다.
책임이 고통을 덜어주는 것은 아니다.
나는 내 직업에 충실한 사람이 되고 싶다. 자꾸 아프다고 내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게 되면 긴장이 풀어지고 페이스 조절에도 실패하게 된다. 다시 말하지만 내가 견딜 수 있는 한 최대한 많은 이닝을 던지는 게 내 일이다. 그리고 그것이 팀의 에이스가 할 일이다.
당신에게 에이스는 어떤 의미인가.
어떤 상황에서도 나올 수 있는 선수가 바로 에이스다. 데이터에 나타난 기록은 에이스를 판별할 수 있는 정확한 기준이 아니다. 팀을 위해 희생할 마음이 있다면 그가 바로 에이스다.
어느 구단의 투수코치가 당신을 가리켜 ‘철완’이라고 했다. 그렇게 던지고도 큰 부상이 없어서 한 말인데
글쎄, 나는 경기 전에 많이 던지지 않는다. 불펜피칭에서도 최소한의 공만 던진다. 경기 중에는 3구 정도만 던지며 컨디션을 조절한다. 오히려 한국투수들이 더 많이 던진다. 한국투수들은 불펜피칭에서 30개 이상씩, 경기 중간에도 20개 이상을 던지며 몸을 풀지 않나. 그렇게 하고도 200이닝 이상을 던지는 한국투수가 많은 걸 보면 대단한 투수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수퍼맨이 아니다.(웃음) 나보고 이틀 전 연습피칭에서 150개를 던지고 오늘 경기에서 100개를 던지라고 하면 어렵지 않을까 싶다.
미국에 돌아가서도 훈련을 계속 하나.
비시즌 동안은 공을 던지지 않는다. 정규시즌 때 내 몫을 다하려면 비시즌에 충분히 쉬어야 한다. 페이스는 스프링캠프 때부터 끌어올리면 된다.
올해로 35살이다. 그런데 신체 나이는 26살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당신만의 체력관리 노하우를 듣고 싶다.
특별한 건 없다. 선수들마다 신체조건이 다르기 때문에 훈련량과 체력관리법도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 나는 미국과 멕시코에서 뛰면서 여러 선수들의 체력관리법을 지켜봤고 그것을 배우려고 노력했다. 이 가운데 내게 가장 적당한 체력관리법을 찾아 현재까지 적용하고 있다. 자세한 방법은 비밀이다.
베테랑
당신에게 두산은 어떤 팀인가.
훌륭한 팀이다. 코칭스태프가 선수들을 관리하는 방법도 마음에 들고 선수들도 항상 가족 같은 분위기를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대개의 야구선수들은 팀에서 뛰는 것을 직장에서 근무하는 것 이상으로 생각하려 하지 않는다. 급료를 받는 곳이니 맞는 생각이기도 하다. 하지만 팀은 단순한 직장이기 전에 한 가지 목표를 향해 달리는 가족과 같은 존재란 점을 잊어선 안된다. 야구는 절대로 혼자 할 수 있는 스포츠가 아니다.
당신은 외국인선수지만 팀을 위한 책임의식만은 한국선수보다 높은 것 같다.
팀에서 내 역할은 시즌 내내 다치지 않고 주어진 이닝을 소화하는 것이다. 진정한 에이스는 팀이 150이닝 또는 250이닝 이상을 던져주길 바라면 묵묵히 마운드 위에 올라가 팀을 위기에서 구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평소 몸관리를 철저히 해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해야 한다.
지금까지 한국에서 뛰면서 특별히 인상 깊었던 선수가 있는가.
경기가 끝났는데 매번 남아서 훈련을 하는 송진우(한화)를 존경한다. 한국에서 최고령 투수로 알고 있는데 한국의 어린 선수들이 보고 배워야 할 투수라고 생각한다.
당신을 존경하는 후배 투수들도 많다.
젊은 선수들이 배워야 할 모델은 팀의 베테랑이다. 송진우를 예로 들자. 그는 두려움 없이 공을 던지는 투수다. 견제능력과 경기운영능력도 매우 노련하다. 똑똑하기도 하지만 열심히 운동했기 때문이다. 이런 베테랑은 젊은 선수들에게 모범이 된다. 나도 매트 랜들, 정재훈과 함께 올해 입단한 임태훈, 이원재 등에게 틈이 날 때마다 조언을 해주고 있다. 1년에 몇 경기 치르지 않는 아마추어와 프로는 다르기 때문에 빨리 프로를 경험하고 배웠으면 하는 마음 때문이다.
어린 선수들에게 기술적인 측면에서는 어떤 점을 강조하나.
언제나 더그아웃에서 타자들의 타격폼이나 버릇을 눈여겨보라고 강조한다. 자신의 경기출전 여부와 관계없이 투수는 상대 타자를 끊임없이 연구하는 버릇을 어렸을 때부터 몸에 익혀야 한다. 투수와 타자의 싸움은 (또렷한 한국말로) ‘장기’ 같다. 얼마나 머리를 잘 쓰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 투수는 잘 던질 줄도 알아야 하지만 위기상황에서 무엇을 던져야 할지 아는 것도 중요하다.
정신적인 측면도 강조할 게 많을 텐데
한국선수들은 눈앞의 상황에만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오늘과 내일의 결과에만 급급하면 그게 바로 혹사다. 미국에서는 선수들이 현역생활을 길게 잡는다. ‘서두르지 마라. 기량있는 선수들이 더 먼 미래를 보고 준비한다면 더 좋은 성과를 거둘 것이다’라고 조언한다.
베테랑의 역할이 외국인선수에게는 귀찮은 일일 수도 있다.
리오스에게 야구는 가족과 인생이다. 그는 야구이야기를 할 때면 늘 웃음을 잃지 않는다.(사진 김수홍) |
야구는 경험의 스포츠이고 어차피 돌고 돌게 마련이다. 베테랑이 어린 선수에게 뭔가를 가르쳐줬다고 치자. 그 어린 선수도 나중에 베테랑이 되게 마련이다. 다시 말해 경험은 돌고 돈다. 이런 선순환이 원활해야 야구도 발전할 수 있다. 국적과 관계없이 경험 많은 선수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믿고 책임감도 느낀다.
방황
2005 시즌 중에 KIA에서 두산으로 팀을 옮겼다.
팀에서 방출되는 건 좋은 일이 아니다. 게다가 팀을 또 하나의 가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충격이 컸다. 특히 KIA 선수들과 헤어지려니 무척 슬펐다. 하지만 겉으로는 긍정적인 생각을 하려고 노력했고 ‘무엇에 시선을 집중해야 하는가’에 대해 고민했다.
무엇에 시선을 집중했나.
만약 KIA에서 방출된 후 미국에서 할 일 없이 지냈다면 ‘아, 내가 버림받았구나’하며 좌절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를 필요로 하고 원하는 팀이 있었다. (잠시 생각하다) 야구선수가 한 팀에서 20년 이상씩 뛸 수 있다는 건 크나큰 행운이다. 대개의 선수들은 이 팀 저 팀 옮겨다니게 된다. 이것이 야구선수의 운명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KIA와 이별도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두산 이적 후 오히려 성적이 좋아졌다. 광주구장보다 넓은 잠실구장과 KIA 수비진보다 뛰어난 두산 수비진의 덕을 봤다는 평이 많았는데
내가 바뀐 건 아무것도 없다. 난 언제나 똑같은 마운드에서 똑같은 공을 던졌을 뿐이다. 내야수비진이라 (묘한 미소를 지으며)야구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지 않을까. 거기까지만 답하겠다. 나머지 답은 당신의 생각으로 대신해 달라.(웃음)
당신의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때가 언제였나.
1999시즌을 끝으로 오마하 로열스(캔자스시티 로열스 산하 트리플A)에서 방출된 후 새 직장을 찾지 못했다. 당시는 대학도 졸업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때가 참 힘들었다.
그때 야구를 그만둘 법도 했는데 지금까지 하고 있다.
대학에서 2과목을 수강하며 학업에 매달렸다. 하지만 미래를 위해 좀 더 돈을 벌어야 했고 야구에 대한 열정도 식지 않아 2000년 멕시칸리그 토레온에서 뛰기 시작했다. 그때 나보다 1년 늦게 뉴욕 양키스에서 방출돼 멕시칸리그에서 뛰던 선수가 있었다. 그는 몇 년 뒤 당당히 메이저리거가 됐다.
그게 누구인가.
조 브로스키(클리블랜드 인디언스 구원투수)다. 같은 길을 가다 언제 다른 길을 갈지 모르는 게 야구선수의 운명이다. 농담 같지만 야구선수의 미래는 아무도 모른다.
KIA가 아니라 삼성에 입단할 뻔했는데
한국프로야구 삼성 라이온즈라는 팀에서 입단 테스트를 한다는 소리를 들었다. 멕시칸리그보다 연봉이 후하다는 말을 듣고 테스트에 응했다. 아쉽게도 결과는 (손을 아래로 내리며) 미끄러졌다.
이유가 있었나.
당시 최고 구속 커트라인이란 게 있었다. 시속 145km 이상이 나와야 뽑힐 수 있었다. 그런데 그걸 넘지 못했다. 몸도 좋지 않았고 정상 컨디션이 아니었다. 하지만 결과에 낙담하지 않고 몸을 단련해 다음 테스트를 기다렸다. 이후 KIA의 테스트에 합격해 드디어 한국땅을 밟게 됐다.
한국
원하던 한국행에 성공했지만 어려움이 많았을 듯싶다.
처음 광주에 도착했을 때 외국인을 위한 시설을 찾을 수 없었다. 미국식 음식점도 없었고 외국인을 반기는 분위기도 아니었다. 특히 광주가 어떤 아픔을 지니고 있고, 반미감정이 심할 수밖에 없는 역사적 이유를 신문기사를 통해 알게 됐다. 외국인인 나로서는 예민한 문제였다. 아내에게 누가 물으면 “캐나다인이라고 대답하라”고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런 우려가 싹 사라졌다. 내 기억 속에 광주는 아름답고 좋은 사람들로 넘쳐나는 곳이다.
빌 머레이가 주연한 영화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를 보면 낯선 외국에서 느끼는 가장 큰 어려움 가운데 소통의 단절감이 있다. 물론 다른 어려움도 많을 테고.
그 영화에서 빌 머레이는 일주일만 고생하지 않았나. 나는 일주일이 아니라 1년 내내 그러고 산다(웃음). 영화에서 빌 머레이가 샤워기 높이 때문에 고생하던 게 기억나는데 그가 일본문화를 잘 알았다면 큰 문제는 없었을 것이다. 나는 열린 생각으로 사람들을 대하고 경기에 나선다. 외국이라고 큰 부담을 가질 필요는 없다. 한국인의 문화를 이해하고 거기에 따라가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문제는 의외로 쉽게 풀리는 법이다.
특별히 한국생활에 도움을 준 사람들이 있나.
마크 키퍼와 워렌 뉴선의 도움이 컸다. 뉴선은 멕시칸리그에서 2년을 함께 뛴 적이 있다. 키퍼는 한국에 오기 전 대만에서 4년간 뛴 경험이 있어 아시아 문화와 사회에 대해 아는 게 많았다. 한국에서 어떤 행동을 하고 어떻게 사람을 대해야 하는지 많은 조언을 했다. KIA에서 두산으로 이적한 후에는 매트 랜들이 팀의 특징 등을 설명해주며 큰 도움을 줬다. 한국에는 내가 먼저 왔지만 두산에서는 랜들이 선배다.
지난해 수원터미널에서 혼자 대구행 버스를 탔다고 들었다. 한국지리에 밝은 모양이다.
그동안 아내와 한국 여기저기를 많이 돌아다녔다. 믿기지 않겠지만 한국에서 야구하는 모든 도시들의 지도를 가지고 있다. 물론 나도 처음엔 어려웠다. 여행할 때 길도 자주 잃어버렸다. 하지만 그때마다 한국사람들이 정말 친절하게 길을 알려주고 잘 도와줬다. 이제는 내가 새로운 외국인선수가 오면 도움을 주게 됐으니 얼마나 기쁜 일인가. 어제는 세스 애서튼(KIA)이 내게 전화를 걸어 대전에 있는 마트의 위치를 물어보기에 친절히 약도를 설명해줬다.
대부분의 외국인선수들이 적응에 실패하고 돌아간다. 이유가 무엇일까.
야구는 어디서나 똑같은 룰을 적용하고 플레이에서도 큰 차이가 없는 스포츠다. 그럼에도 성공과 실패로 나눠지는 이유는 두 가지다. 우선 정신력 차이다. 푸에르토리코는 언어와 생활환경이 미국과 거의 비슷하다. 하지만 여기서도 적응에 실패하는 선수들이 많다. 강한 정신력으로 문화적 차이와 언어의 한계를 극복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쉽게 포기해 버린다. 두 번째는 리그에 대한 존경심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리오스, 아들 매튜, 아내 카렌, 딸 가브리엘.(사진 제공=리오스) |
리그에 대한 존경심이라면
메이저리그를 제외한 다른 나라의 리그를 우습게 보는 선수들이 많다. 어떤 선수는 연봉만 보고 그 나라 리그를 평가하려 든다. “이 정도 연봉이라면 약한 리그일 게 뻔하다”고 생각하기 일쑤다. 하지만 한국만 해도 뛰어난 선수들이 얼마나 많은가. 자기가 뛰는 리그를 존경해야지만 그 나라 야구수준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고 좋은 경기력을 선보일 수 있다.
처음 한국타자를 상대했을 때의 느낌을 듣고 싶다.
한국타자들의 맞히는 능력이 무척 뛰어나 당황했다. 큰 어려움은 없었지만 거기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다. 요즘 한국타자들은 메이저리그처럼 힘을 앞세운 공격적인 성향으로 변한 것 같다.
당신은 미국과 멕시코 그리고 한국야구를 경험했다. 이들 리그가 어떻게 다른지 듣고 싶다.
모든 리그가 저마다 특색이 있고 분위기가 다르기 때문에 평가하기 힘들다. 각 나라 리그 수준을 함부로 평가해서도 안되고. 다만 메이저리그는 확실히 다르다. 그곳은 세계 최고의 선수들만이 뛸 수 있는 무대가 아닌가.
당신이 뛴 팀들은 우연히도 하나같이 전통있는 팀이었다.
뉴욕 양키스, KIA를 비롯해 멕시칸리그와 푸에르토리코에서 뛴 팀들이 모두 자국리그에서 우승을 가장 많이 한 명문팀들이다. 하지만 나와는 관계없는 일이다.(웃음) 그것은 어디까지나 과거의 일이고 현재의 리오스가 팀에서 어떤 위치에 있고 얼마나 팀에 기여할 수 있는가가 중요하다.
당신의 한글 독해력은 대단한 수준이다. 특별히 한글을 공부한 이유가 있나.
한글을 공부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상대팀을 분석하는 리포트를 제대로 읽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생각보다 한글이 어렵지 않았다. 나는 주로 한글교육 CD를 통해 독학했는데 아내는 학원까지 다니는 정성을 들였다. 팀에서는 정재훈이 한글을 많이 가르쳐주고 있다. ‘뒤질래’도 정재훈이 가르쳐줘서 요즘 많이 쓰고 있다. (리오스는 이뜻을 정확히 알지 못했다.)
재미난 에피소드가 많았을 텐데
지금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데 구원투수로 나가 2이닝을 던진 경기가 있었다. 상대팀이 점수를 뽑지 못해 13회를 던지려고 마운드에 올라갔는데 아무도 따라 나오지 않았다. ‘어, 이거 왜 이러지’ 싶어서 주변을 돌아보니 나오기는커녕 짐을 챙기고 있었다. 나중에 한국은 연장 12회까지 승부를 내지 못하면 무승부 처리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얼마나 민망하던지 고개를 숙이고 마운드를 내려왔던 기억이 있다.
가족
지난해 두산이 4강 싸움을 벌일 때 당신의 아버지는 병과 사투를 벌였다. 당신이 아버지 문병을 위해 미국에 갔을 때 이를 두고 말들이 많았다.
어릴 적 봤던 기사 가운데 이런 게 있었다. 월드시리즈를 앞두고 오렐 허샤이저(전 LA 다저스 투수)가 나처럼 아버지가 위독해 집으로 갔다고 한다. 그런데 허샤이저의 아버지가 아들을 반기는 대신 “네가 여기서 할 수 있는 게 무엇이냐”고 물었단다. 허샤이져가 대답을 못하니까 “팀도 네 가족이다. 지금 네가 여기 있는 건 나에게도 가족에게도 너의 또 다른 가족인 팀원들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이다. 그러니 어서 야구장으로 돌아가라”고 말했다고 한다. (잠시 고개를 숙였다가)내 아버지도 내게 같은 말을 들려주셨다.
문병을 마치고 팀에 복귀하자마자 4강을 가리는 KIA와의 일전에 투입됐다. 그러나 아쉽게도 팀은 지고 마는데
경기에 지고 나니 무척 화가 났다. 하지만 그라운드를 벗어날 때부터는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시즌 126경기 가운데 그 경기 때문에 팀이 포스트 시즌에 진출하지 못한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내겐 한 경기 한 경기가 똑같이 소중하다.
당신은 팀을 또 다른 가족이라 말한다. 하지만 정작 가족과는 많은 시간을 함께 할 수 없는 야구가 직업이다.
직업에 따른 어려움을 극복하는 일은 가족 구성원들이 극복해야 할 과제라고 생각한다. 내 아버지는 트럭을 몰았다. 하루 12시간이 넘게 운전하고 밤늦게 귀가하셨지만 아버지는 항상 나를 사랑해주셨다. 나도 정신없이 일정을 소화하지만 비시즌 동안은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낸다.
은퇴 후 지도자로 나서도 좋을 듯싶다.
독신이었다면 코치나 감독을 은퇴 후 목표로 삼았을 것이다. 그러나 나에겐 사랑하는 가족이 있다. 지금도 원정을 포함해 야구 때문에 가족과 떨어져 있는 시간이 많다. 은퇴 후에는 가족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직업을 찾을 생각이다.
마이애미대에서 금융학을 전공한 것으로 안다.
그렇다. 현재 재무전문가가 되기 위해 틈이 날 때마다 관련된 공부를 하고 있다. 아마 은퇴 후 진로도 그쪽이 되지 않을까 싶다.
야구란 당신에게 무엇인가.
처음 야구를 만났을 때부터 야구가 좋았고 훌륭한 야구선수가 되고 싶었다. 어릴 때 아버지와 야구를 보러 다녔다. 지금도 아버지는 야구를 굉장히 좋아하신다. (환한 표정으로)지금 생각해보면 야구라는 매개체가 아버지와 나 사이를 더욱 친밀하게 만든 것 같다. 그래서 내게 야구는 인생이자 가족이다. 야구가 나를 원하지 않아 글러브를 벗는 날이 와도 나는 항상 야구를 필요로 할것이다.
SPORTS2.0 제 46호(발행일 4월 9일) 기사
박동희, 이종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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